[제1장 게릴라 부대의 봉쇄와 격멸]05.아르간답 강의 녹색지대 봉쇄와 탐색 by Zündschnur

05.아르간답 강의 녹색지대 봉쇄와 탐색 by 중령 젤렌스키(S. V. Zelenskiy)

(젤렌스키 중령은 1981년부터 1983년 사이 아프간에서 공중강습 중대장과 여단 작전과 선임 작전장교로 근무하였고, "붉은 군대 훈장"을 수상하였다.)


 1982년 10월 우리는 아르간답 강과 경계를 이루면서, 녹색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칸다하르 시 북쪽에서 활동 중인 총 병력 350명의 게릴라부대가 있다는 것을 수색정찰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비옥한 녹색지대는 강의 북쪽을 따라서 15~20km 정도 펼쳐져 있었고, 폭이 7km에 달했다. 이곳은 포도밭과 야채받으로 구성된 경작지역인데, 농수로가 거미줄처럼 잘 발달되어 있어서 어떤 곳은 차량이 통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단은 이 무자헤딘 게릴라 부대를 섬멸하라는 명령을 수령하였다. 여단장의 작전개념은 3개 대대의 기갑집단(bronegruppa)으로 부쪽을 격리하고, 헬기 정찰과 헬기 화력지원으로 남쪽과 동쪽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분리된 적은 기계화 소총 2개 대대와 공중강습 1개 대대가 투입되어 서쪽에서부터 이 지역의 적을 위력수색하고, 이 때 포병 대대가 탐색격멸부대를 직접 지원하기로 하였다.
 부대는 야간에 집결지로 이동하였고 각 부대의 위치를 지정받았다. 10월 6일 05:00시경, 대대의 기갑집단은 지정된 진지를 모두 점령하였고, 도보 병력들은 그들의 집결지에서 기동을 시작하였으며, 포병대대는 포병진지를 점령한 후, 사격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췄다.
 05:30시에 여단장의 신호에 따라 부대는 광활한 정면에 탐색격멸작전을 개시하였다. 제 3기계화 소총대대는 좌측, 제1기계화 소총대대는 중앙, 공중강습대대는 우측에 위차하여 작전을 개시하였다. 순간 5~7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게릴라 집단이 원거리에서 우리 예하부대에 간헐적인 소화기사격을 가하고 북동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우리 예하부대는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16:00시에 듀비 중위가 지휘하는 제2 강습중대가 40여명의 무자헤딘과 접촉하는데 성공하였다. 적은 약 1km 정면에 잘 조직된 방어태세로 전개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우측 제1 강습 중대로 하여금 제2 강승중대 정면에서 방어중인 적을 오른쪽 측면으로 우회 기동하여, 포위하도록 지시하였다. 대대장의 의도는 제2강습중대와 접촉 중인 적을 북동쪽으로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섬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중위로서 제1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 중대를 수습하여 기동을 시작하는데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이러는 동안 적과 대치하고 있던 제 2 중대는 지속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했고, 적도 진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17:00시경, 나는 우리 소대들을 우회 기송시켜서 무자헤딘 북동쪽을 차단할 수 있는 봉쇄진지를 점령하였다. 나는 예하소대를 북동쪽에서 북쪽방향으로 뻗어있는 흙벽 위에서 봉쇄진지를 구축하였다. 막 예하부대가 정위치를 했을 때, 대대장이 추가적인 전투력을 할당시켜 주었고, 나를 포함하여 중대본부 7명이 우측에 치우쳐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정확한 진지위치를 조정하기도 전에 약 70여명의 적병력이 중대본부 지역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6명의 부하와 함께 철수하려는 적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무렵 대대와 예하중대를 연결하는 무전망이 모두 불통이었다. 다행히도 여단망이 연결되었고, 여단장은 화력유도를 위한 정확한 내 좌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정확한 우리 진지 위치를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50m 내외의 오차라고 덧붙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좌표를 아려주었다. 그러나 포병은 정확한 좌표를 모르고서는 사격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적은 3회에 걸쳐서 우리진지의 돌파를 시도하였다. 적의 3번째 공격간에는 중대지휘소의 탄약이 부족하였다. 적과 접촉단절 후 타 소대로 철수할 것을 결심한 나는, 중대본부요원에게 지시에 의거 동시에 수류탄을 투척하게 한 후, 적과 접촉을 끊고 1소대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적이 숫적으로 우세하였기 때문에, 1소대와 연결한 이 후에도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우리는 20명의 적 게릴라를 사살하였으나, 중대의 사상자는 없었다.

 프룬제 군사학교 강평: 이러한 국부적인 교전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여단급 규모의 봉쇄와 탐색격멸작전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헬기를 이용한 지역 봉쇄
  • 예하부대의 긴밀한 협조
  • 기술적인 전투지휘와 전쟁에서의 올바른 결심을 하는 능력
  • 공중강습중대 중대본부 요원의 주도권 쟁취 및 진지사수의 확고한 결의
  • 통신두절
  • 소대장의 독단활용 능력 부족(소대 우측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중대장으로부터 지시만 내려오길 기다렸다)
  • 적에 의한 기만(진지 후방의 곧은길로 철수하는 대신, 그들은 진지와 평행한 방향인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저자 강평: 이 포위전술은 소련군이 물리적으로 전면을 포위하는 유럽형 전술과 다르다. 아프간에서는 봉쇄부대를 저명한 지형지물을 점령하게 하거나 마을의 한쪽 면만 담당하도록 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봉쇄부대와 근접해 있는 부대간의 오인사격을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소련군은 아프간에서 때때로 헬기정찰, 기갑집단, RDM(소련군이 활용하는 살포식 지뢰, 미국의 FASCOM과 유사함)을 활용하여 한쪽 면을 봉쇄함으로써 병력절약의 효과를 추구하였다. 이 절에서는 동일 목적으로 기갑집단과 헬기정찰이 활용되었다. 그러나 숲이 우거진 동부지역에서 헬기정찰로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절의 주된 교훈은 소부대지휘관이 작전지역에서 통신이 두절되었더라도 전투에 임하여 주도권을 쟁취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보장되고, 이러한 상황에 적을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대장이 중대장과의 통신두절 상황을 알고 있었느냐 하는 것과 이러한 통신두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절에서의 문제점은, 포병은 지상부대 지휘관이 자기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있을 경우에는 화력지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상부대 지휘관이 50m 이내의 오차로 자신의 위치를 식별했지만, 여단장은 포병화력 지원을 허락하지도, 적에게 정확한 포격을 하기 위한 화력조정을 승인하지도 않았다. 이 중대에는 관측장교가 없었고, 공중강습 중대장 역시 포병화력을 유도할 능력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도 중대장이 화력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련군 포병은 통상 계획된 순서에 의해서 사격을 실시하고, 화력계획(사전 측정된 사격지점을 바탕으로 작성됨)을 기초로 전 화력을 집중하여 사격한다. 좀더 정확하게 유도된 포병화력보다는 대규모의 화력파괴라는 방법을 더욱 선호한다는 것이다. 소련군 포병은 지상에서 그들의 관측장교 없이 발생할 우군피해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소련군의 화력파괴 사격방법은 전투하면서 이동하는 게릴라 부대, 특히 대량 화력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 적 부대에겐 적합하지 않았다. 한 가지 의심나는 것은, 만약 여단장이 사격을 허락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기보다 우군 피해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조사와 심문 등 개인적인 고통을 당할 터인데, 과연 화력요청을 허락했겠냐는 것이다.